)에서 한 말이다. 김옥균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에게 변혁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시도한 선구자로 평가된다. 개화사상의 주도자이자 갑오개혁의 선도자로서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김옥균의 정치와 사상을 김옥균의 일생과 관련하여 조명해보고자 한다.
말았다. 대원군이 실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의 탄핵 상소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10년 동안의 강권 통치로 인하여 반대 세력이 많아진 것과 야심 많은 고종의 왕후 민씨의 권력욕이 큰 몫을 차지했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정권은 민씨 일파의 독무대가 되었고, 사회
말에 이르면 조선의 서구와의 개항 문제가 논의되면서 이와 관련해 조선 .중국 양국 간의 전통적 해금 , 조공관계를 근대 외교, 통상관계의 틀 속에서 재조정할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마침 조선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한다. 청은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이홍장의 북양육군 3000명을 서
이홍장은 청나라의 근대화를 위하여 기초를 쌓은 모든 사업을 함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이 그 덕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이홍장은 국가의 현상과 앞날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고 보다 개방적이며 보다 절실하게 인식하였다. 청나라말기의 내우외환, 정치부패, 경제낙후, 가난하고 약자들이 많은 사회배경하
이홍장 ·좌종당 등 한인 관료와 공친왕 등 궁정대관료는 근대무기의 수입 ·제조를 개시하고 군사공업을 일으켰다. 한편, 장즈둥·성쉬안화이·장젠 등도 관상합판사업을 크게 일으켜, 한때 청나라의 지배체제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 자강운동은 군사중심의 근대화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에 사회 ·정
청일 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변법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1895년 시무보를 창간해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청일 전쟁의 패배 이후, 강유위는 공거상서를 써 황제에게 상주해 개혁의 길을 제시한다. 이러한 개혁의 주장은 강유위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계속해서 주장되었고, 이는 광서제
청은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내세워 조선에서의 권한을 확대하였으며, 새로이 정권을 잡은 민씨일파는 청에 의지하는 사대당으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홍장의 주선에 따라 중국인 마건상과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외교고문으로 맞이하였으며, 관계를 다시 개혁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청의 對조선 정책
1)청조와 조선왕조 : 청한 종속관계
-명을 멸하고 중국을 지배하게 된 청조는 건국 초기의 강압과 대결이 끝나자 양국 간의 종속관계를 회복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청한 종속 관계는 조선의 군신 들의 끈질긴 '崇明反淸' 감정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까지 2백여 년 간 대체로
청일전쟁 후 무술변법 유신운동이 일어났다. 주지하다시피 서태후는 일거에 무술변법 운동을 진압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태후가 변법유신 자체를 줄기차게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이로써 완고한 서태후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
외교에서는 무조건적 최혜국 대우의 부정 및 조약 폐기론의 부분적인 단행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동아시아 외교는 청에 대신한 패권 지향으로 나타났는데, 그 내용은 청일관계의 차별화, 조일 불평등 관계의 고착화, 그리고 조선 독립의 부정을 발판으로 한 일본단독의 조선 보호권의 확보였다. 아울러